전 지구를 휩쓸고 있는 신종 전염병으로 인한 팬데믹(pandemic)부터 기후변화, 미세먼지, 콘크리트 산과 플라스틱 바다….
지난달28일 부산 수영구 구락로(옛 망미동)의 복합 문화공간F1963에서 개막한 ‘2021부산국제사진제’에는 아시아부터 유럽, 남미, 극지방까지 전 세계의 대륙에서12명의 사진작가들이 목격한 ‘인류세 시대 지구가 보내는SOS구조신호’의 생생한 현장이 선보이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인류로 인해 열린 새로운 지질시대를 가리키는 새로운 용어다. 지질연대표의 시간대를 구분하는 명칭은 대부분 라틴어나 암석이 처음 발견된 지역을 따서 붙여졌다. 석탄기(Carboniferous)는 영국에서 발견된 석탄이 풍부한 암석을 가리켜 ‘석탄이 함유한’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비롯됐다. 쥐라기(Jurassic) 역시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사이에 놓인 쥐라 산(JuraMountain)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1995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대기과학자인 파울 크뤼천이2000년 처음 제안한 ‘인류세’는 새로운 지질시대 개념이다. 지금까지 계속되던 충적세가 끝나고 이제 과거의 충적세와는 다른 새로운 지질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인류세’는 환경훼손의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현재 인류 이후의 시대를 가리킨다. ‘인류세’를 대표하는 물질은 방사능물질,대기 중의 이산화탄소,플라스틱,콘크리트 등을 꼽는다. 고생대의 대표적 화석은 삼엽충,중생대는 암모나이트다. 한 해658억 마리가 소비되는 닭고기의 닭 뼈를 인류세의 최대 지질학적 특성으로 꼽기도 한다. 수백만 년 뒤에는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KFC코카콜라’로 명명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사진제의 ‘인류세-SaveOurPlanet’주제전은 부산, 대구, 천안 등 국내는 물론 벨기에 브뤼셀까지 이어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올해 부산국제사진제 총감독을 맡은 석재현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대표는 작년에 이어 올해의 주제도 ‘인류세Ⅱ’로 정했다. 프랑스, 미국, 멕시코, 스위스, 중국, 독일, 한국 등12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빙하가 녹고, 멸종 위기의 동물이 늘어나는 가운데 개발을 계속하고 있는 지구의 현재의 모습을 강렬한 이미지로 담아냈다.
입구에 들어서면 독일의 사진가인 톰 헤겐은 지구 표면에 남겨진 인간의 흔적을 보여주는 추상적인 항공사진 작품이 눈에 띤다. 회색빛 산에서 흘러나오는 검은색 잉크같은 광물질이 누런 강물을 물들이고, 붉은색과 초록색을 띠는 탄광의 호수 위로 독수리가 유유히 날고 있다. 형형색색의 오염물질이 자칫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내 역겨워진다.
샤를 젤로 ‘툰드라 아래, 가스가 있다’러시아 작가 샤를 젤로는 순록을 기르는 유목민인 네네츠족이 살고 있는 툰드라의 지하 가스채굴 산업현장을 촬영했다. 이곳에서 채굴된 가스는 액화되어 전 세계로 해상 수송된다. 눈보라 휘날리는 툰드라의 대자연과 가스 채굴 공장의 초현대식 시설이 대비되는 작품이다.
한국의 사진작가 황규태는 ‘묵시록 그 이후’(AfterApocalypse)라는 연작을 통해 무한복제되는 아기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욕심을 경고하는 ‘미래의 묵시록’을 선보인다. 포토 몽타주 기법, 이중노출, 필름태우기(버닝), 디지털 이미지까지 다양한 기법을 통해 핵전쟁, 생명공학, 인류문명의 위기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중국 작가 야오루는 중국 고전적 미적 화풍을 차용한 포토몽타주 표현기법의 작품을 전시한다. 멀리서 보면 동양의 수묵화를 연상시키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완벽했던 산과 강은 쓰레기 더미들을 초록색 폐기장 그물망으로 감싼 모습이다. 한때 조화로웠던 자연이 파괴되고, 오염된 환경을 드러내는 극명한 대비다.
제이미 스털링스가 태양광 발전 시스템이 설치된 부지를 하늘에서 촬영한 작품은 마치 디자인의 문양처럼 보인다. 석재현 전시감독은 “이번 주제전은 사회현상이 담긴 다큐멘터리 사진 뿐만 아니라 예술적 형식의 확장을 통해 강렬한 시각 메시지로 기후환경에 대한 시대적 담론을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부산국제사진제는 지난해에는 부산항대교와 부산항이 보이는 영도구 폐조선소에서 열렸다. 거청조선소는 과거 조선소였다가 문을 닫은 곳으로, 사진 작품과 부산항 전경을 볼 수 있는 이색 전시공간이었다. 올해는 옛 고려제강 수영공장을 재생한 복합 문화공간인 ‘F1963’에서 열리고 있다. 고려제강은 철제 와이어를 전문으로 생산해온 회사로서 전시장 내부에 들어선 테라로사 커피숍에도 와이어를 재활용한 실내 인테리어가 설치돼 있다. 부산국제사진제 백성욱 조직위원장(부산예술사진가회 회장)은 “부산의 사진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행사가 국제적인 사진제로 발전하게 된 것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전시장 외부에는 대나무숲길, 달빛정원 등이 옛 공장시설과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부산국제사진제 전시장은 야외 대나무숲길에서도 열리고 있다. 경남 창녕 우포늪에서 생태사진을 찍어온 정봉채 작가의 ‘따오기’ 사진이 대나무숲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특별전으로는 ‘부산작가 초대전-사타’가 열리고 있다. 트라우마를 겪어서 생긴 감정을 주제로 작업을 해 온 사타는 불안과 공포 등 현대인이 가진 각종 증상을 표현한 작품을 선보인다. 사타는 지금 각종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미래에 ‘증상인간(HOMOSYMPTOMUS)’이라는 신인류일 수도 있음을 사진으로 전한다.